수사학적 소통 모델
대학에서는 대부분 말하기 능력보다는 글쓰기 능력을 강조합니다. 사고를 정교하게 가다듬기 위해서는 쓰기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진정한 소통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글쓰기를 넘어서 그 글이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독자에게 공유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과정을 철저히 구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소통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문어체 중심에서 벗어나서 편하고 이해하기 쉽고 듣기 좋은 구어체를 통해 서로 피드백을 하고 의미를 공유하는 소통의 전 과정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통인을 양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적이고 이 교과목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인간의 원형을 보면 문자성보다도 구술성이 앞섭니다(Ong, 1982/2009). 즉, 문자로 적은 내용, 언어 체계로서의 문자성이 존재하기 이전에 구술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구전문학을 들 수 있습니다. 문자성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로만 전해 내려왔던 것들을 문학적으로 연구해보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진화과정을 보면 구술성이 문자성보다도 앞서며 우리의 본성과 좀 더 맞닿아 있는 측면이 강합니다. 최근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변화를 보면 문자성보다 구술성이 중요시 되고 있습니다. 예로서 유튜브나 영상통화 등이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인 소통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문자성의 강조가 종교개혁과 연결된 배경에는 성경의 해독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고, 기록성에 의해서 흔적이 남습니다. 기록성의 측면에서 보면 유튜브를 포함한 동영상의 가치도 눈여겨볼 시점이 되었습니다. 동영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기록이 아니라 동굴벽화에 고대인의 흔적이 남아 있듯이 어떤 형태로든 보존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록성에 있어서도 문자에 뒤지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귀로 듣는 책(audible book)이 나왔습니다.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책에서 귀로 듣고 이해하는 책, 그리고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듣는 책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소통양식의 변화가 예상됩니다. 즉, 구술성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입시면접, 입사면접 등 모든 면접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질문을 통해서 사람의 역량을 검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구술 능력을 보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도 말하기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입말과 글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학에서 글말만을 강조했으나 이젠 입말도 중요합니다. 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쓴 것을 새롭게 입말을 통해 전달하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에 대해 배우는 것이 <소통과 스피치>, 또는 <스피치와 프레젠테이션> 교과목입니다.
스피치의 수행은 대단히 목적지향적인 행동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스피치를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구사를 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했는가를 평가하고 또 다른 전략을 세울 때 평가 결과를 반영하여 더 나은 전략을 세우거나 목표를 수정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청중을 목표로 다양한 효과를 거두기 위한 전략을 세울 때에는 경험을 살려서 더 나은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목표 지향적 행동은 인간의 습성과 맞아 떨어집니다. 대규모 사업 수행뿐만 아니라 스피치 메이킹, 즉 연설을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목표 지향적 행동 중의 하나입니다. 목표 지향적 행동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목표의 과정, 단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회과학적으로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하는 것이 모델입니다. 모델이란 사회과학적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시각적 또는 상징적인 것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구성도입니다.
다양한 소통 모델이 나와 있지만 우리가 공부해야 할 모델은 수사학적 소통모델(rhetorical communication model) (McCroskey, 2006)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SMCR(Sender, Message, Channel, Receiver) 모델은 대중매체(mass media), 대중전달(mass communication)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모델입니다. 예컨대 텔레비전 또는 인터넷을 통한 메시지가 어떻게 흘러 최종적으로 시청자, 혹은 청중에게 전달되는가 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델입니다. 물론 모델과 이론은 차이가 있습니다. 모델은 현상을 초래하며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이론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요소들 간의 관계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고 이 원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절제된 최소한의 언어적 기호를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예측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SMCR모델은 요소와 요소간의 관계는 보여주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이 전달되고, 전달하는 사람은 어떤 내적 과정을 겪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스피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모델이 아닙니다.
수사학적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인코딩과 디코딩의 과정입니다. 즉, 인코딩과 디코딩으로 구성된 수사학적 모델이 스피치 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더 유용한 모델입니다.
인코딩은 어떠한 상징을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어떤 의도를 청중에게 전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여러 가지 단어나 상징적 의미를 평가해보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대적 맥락이나 청중들이 이 단어를 들었을 때의 느낌,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인코딩을 결정하게 됩니다. 인벤션(invention)인 주제를 고안하는 단계, 내용의 배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단어로 표현 할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고민하게 되는데, 그것을 메모로 만들고 핵심 내용을 암기하여 전달하는 것까지의 전 과정이 인코딩이고, 이와 같은 인코딩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소통과 스피치>, 또는 <스피치와 프레젠테이션>과 같은 교과목입니다.
디코딩은 해석과 이해, 의미부여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해독하면서 인코딩한 사람의 의도나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통과 스피치>, 또는 <스피치와 프레젠테이션>과 같은 교과목에서 인코딩을 강조한다면 <스피치 비평>과 같은 교과목에서는 디코딩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한 쪽만을 잘하는 것이 아닌 양쪽을 다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상황에 맞게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선택해서 구사하는 인코딩 능력도 중요하지만 남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디코딩 능력, 즉 이 두 가지 능력이 조화를 이루고 유기적으로 상황에 맞게 적절히 잘 작동되는 사람이 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코딩 과정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원하는 목표달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코딩과 디코딩 과정에서 노이즈가 발생하게 됩니다. 노이즈는 잡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과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주제고안, 단어선정 등에 있어서 지식과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것이 하나의 잡음, 즉 노이즈가 될 수 있습니다. 인코딩은 메시지뿐만 아니라 전달이라고 하는 중요한 요소를 포함합니다. 중복성(redundancy)도 중요합니다. 글쓰기에서는 중복이 되면 지적을 받지만 말하기에서는 적절한 중복이 필요합니다. 말은 한번 듣고 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반복적으로 강조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디코딩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메시지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달하는 제스처 등의 비언어적인 것, 그리고 자신이 처한 문화, 계급, 시대, 또는 경험 등을 고려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해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마치 단어의 의미가 단어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McCroskey, 2006). 의미는 단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의미는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고 이해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의미이지 사전에 쓰여 있는 단어 자체가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이 아무리 단어 선택을 잘 했어도 읽는 사람인 청중의 이해에 기반하고 있지 않으면 의도한 의미를 생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는 또 다른 오해는 소통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McCroskey, 2006).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경우도 있습니다. 소통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소통은 도구이지만 지나치게 도구로 보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소통을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소통이 꼭 수단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도 될 수 있고 존재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소통불안이 소통능력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통불안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고 타고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없애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McCroskty, 2006). 오히려 소통불안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면 소통역량을 극대화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스피치의 목적은 정보제공, 설득, 또는 감동, 등 다양합니다. 맥크로스키 교수는 정보제공보다는 이해창출이 목표로 더 적절하다고 했습니다(McCroskey, 2006). 정보제공이란 전달자의 입장에서는 정보제공이 될 수 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해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에서 끝나는 것은 소통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창출이라는 말이 소통적 특성에 더 맞습니다.
설득도 단순히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감동을 주는 스피치가 있으나 맥크로스키(2006)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스피치를 준비하기에 앞서 살펴본 수사학적 소통모델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다양한 스피치 유형의 특성을 파악하고 목적과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인코딩해서 청중에게 자신이 의도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꼼꼼히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고 평가자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통해 스피치 수행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저자: 허경호(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온소통 대표) | 허경호 (2012). <소통과 스피치>, 서울: 온소통.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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