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수업을 통해 대학인으로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도록 하여 문화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한다는 취지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입사 시에 유리하다는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대기업이나 방송 및 언론사 등에서 최종면접 때 요구하는 것이 지원자의 토론능력입니다. 최근에는 입사시험과 대학 입시전형에서도 프레젠테이션을 통한 토론식 면접 전형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와 같은 토론식 면접을 보면 아카데미식 토론에서의 준비 시간, 입론, 질의 등과 같은 토론의 구성 요소와 매우 흡사합니다. 결국 고등학생도 토론 준비가 곧 대학입학 준비이고 대학생들도 토론 준비가 곧 입사 준비가 된다는 말입니다.
법조계에서도 토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실례로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참여법정에서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재판 결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재판이 진행됩니다. 물론 최종적인 판단은 판사에게 있습니다만 이는 사법사상 획기적인 일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전문가가 아닌 상식을 가진 일반시민이 재판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근간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토론수업이 필요한 이유 중 또 하나는 국내에서 공부를 마치고 외국, 특히 영국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학생들의 경우 해당 학교에서 토론활동에 필요한 능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로서 최근 런던대학의 대학원 추천서에 제시된 지원자 능력평가 항목을 살펴보면서 한마디로 토론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스스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토론의 경우에도 역시 자기가 직접 자료를 찾아서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2) 단시간 동안 혼자 일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토론의 경우에도 해당 논제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입론을 구성하기까지 혼자서 해내야 하는 부분입니다.
3) 출처가 서로 다른 자료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4) 새롭게 자료를 해석할 수 있는 독창성입니다.
5) 주장을 정교화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능력이 글로 발휘되는 것이 곧 논문입니다.
6) 정리한 것을 제 시간에 제출하는 능력입니다. 토론 역시 짧은 시간에 자료를 준비하여 입론을 만들지 못하면 토론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7) 학술공동체와 인생에서 협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토론의 경우 2대2 토론을 포함한 팀 단위 토론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전 과정이 함께 이뤄지므로 토론에서 협동 능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위에서 말한 일곱 가지 능력이 토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고 보기에 토론은 총체적인 지적 훈련입니다.
다음으로 토론식 수업의 장점을 알아보겠습니다. 다양한 장점 중에서도 몇 가지만을 제시해보겠습니다(Meany & Shuster, 2003/2008).
1)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단답형이라기보다 논리를 개발하고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습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즉, 정답을 찾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정답을 만드는 능력을 말합니다.
2) 지식이 단순히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명료하고 설득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함양됩니다.
3) 자기주도적 학습이 가능해집니다. 앞서의 런던대학이 대학원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4) 비판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말하기 평가는 객관성을 담보하기에 다소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최근 영어에서는 말하기 테스트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 역시 TODC(Test of Debate Competence)를 만들어 확산시켜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5) 토론은 본질적으로 학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론이 언론정보학과 같은 전공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법대, 이공대, 문과대 등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 새로운 형태의 지식 창출이 가능합니다.
7) 감정이입, 즉 서로 입장을 바꿔서 이야기해보는 ‘역지사지’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필자는 2011년 동아일보에서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여당과 야당 의원이 서로 입장을 바꿔 진행한 토론의 사회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서로 현직 국회의원이므로 방송에서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이었음은 사실입니다만 시도 자체는 좋았다고 봅니다.
역지사지와 관련하여 힐러리 클린턴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고등학교 때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였는데 토론수업으로 인해 민주당으로 입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토론수업에서 입장을 바꿔 토론했는데 당시 교사는 입장을 바꿔봤을 때 진정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더 강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말해줬고 결과적으로 민주당 소속인 지금의 힐러리 클린턴이 탄생한 것입니다. 역지사지의 힘이라고 봅니다. 저희 토론인증제에서도 긍정과 부정 양쪽 다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유가 이슈에 대한 입체적 감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토론식 교육을 통해 기를 수 있는 기초적 능력 일곱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Snider & Schnurer, 2006).
1)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 비판적 사고력도 기를 수 있습니다.
3) 토론 준비나 토론에서 메모하는 능력입니다.
4) 논증 능력을 기릅니다. 합리적 결론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까지 제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설득적인 주장을 펼 수 있게 됩니다.
5) 반박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상대의 논리전개에 대해 나름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능력도 토론에서 꼭 필요합니다.
6)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남이 표현해 놓은 지식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로 변환시켜 전달하는 능력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로 지식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능력입니다.
7) 조사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즉 주장과 근거의 발판이 되는 조사능력 역시 중요합니다. 자료의 양이 많기 때문에 적절한 자료원(sources)을 찾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나라가 압축 성장을 통해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왔지만 아직까지도 치르고 있는 갈등비용이 너무 큽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 때문에 여태까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 개개인이 비판적 사고력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토론능력을 갖춰야만 선진국에 비로소 진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토론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비판적 사고력을 통해 어떤 일이 가치 있는 일인지, 좋은 일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이라고해서 무조건 선의를 가졌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오류가 있으면 근거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주장이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을 통해 시정될 수 있도록 만드는 깨어 있는 국민이 돼야 합니다. 또 그리고 필요할 때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국민이 존재할 때만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위 소통의 시너지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단순히 혼자만의 지식 습득에 머물지 않고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지식을 창출, 확대해서 타인에게 자극을 주고 또 타인의 의견을 수용해서 집단 시너지 효과를 내면 결국 지식창출과 확대가 가능하고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초중고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교육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토론 과목을 추가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수업 자체를 토론 형식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학생 개개인의 수행을 제대로 평가해줄 척도를 개발해서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 평가가 이뤄져야 합니다. 토론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제대로 된 토론을 평가하는 기준이 모호해 토론문화의 성장이 멈추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수업이 이뤄지고 화상으로도 토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한 소통방법을 통해 지식을 나누고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학문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결국 경제의 압축성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통문화에서도 압축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후기 실증주의자인 칼 포퍼는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but with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이 맞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토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고 합리성에 근거한 최적안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논어 중에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이든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듯 토론을 통해 주제에 대해 알고 관심이 생겨 좋아하고 궁극적으로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좋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세계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토론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
저자: 허경호(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온소통 대표) | 도서 <논증과 토론(출판: 온소통)> 중 발췌
* 본 내용은 논증과 토론 도서에서 발췌한 것으로 무단 복사를 금합니다.
댓글